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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밥 먹었어?", 김할머니와 나의 하루

by 인디언서머 2025. 7. 20.


치매 어르신 김할머니를 처음 뵌 건, 봄 햇살이 참 따사롭던 날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응, 밥 먹었어?”
첫 만남부터 할머니와 나 사이엔 아주 특별한 인사 루틴이 생겼습니다.
만날 땐 “밥 먹어”
대화 중엔 “밥 먹었어?”
집에 돌아갈 땐 “밥 먹고 가”


김할머니의 언어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든, 오늘 뭘 했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밥은 먹었냐는 거죠.
“배고프면 아무 일도 못 해. 사람은 밥이 먼저야.”
할머니의 삶의 철학은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릅니다.


우리는 몇 차례나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을 주고받습니다. 
언뜻 보기엔 맥락 없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나는 이 말이 할머니의 ‘정서적 신호’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밥 먹었냐’는 말은 단순한 생리적 물음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에서 가장 원초적인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잖아요.
엄마가 자식에게, 할머니가 손주에게, 이웃이 이웃에게 건네는 말.
“어떻게 지내니?” “잘 있니?” “너 괜찮니?”라는 질문이 "밥 먹었어?"라는 짧은 문장에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할머니와 요양보호사


사람들은 요양보호사라 하면, 주로 식사 보조나 위생 관리, 병원 동행 같은 물리적 서비스를 떠올립니다.
물론 그런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습니다.
어르신께 말 상대가 되어 드리는 것이지요.
대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치매 어르신인 김할머니의 인지자극을 위해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바로 ‘말 주고받기’입니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어르신들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고 반응도 궁금해하십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들과 상대방이 살아가는 이야기
저는 할머니의 사생팬처럼 이것 저것 많이 물어봅니다.
매일 똑같은 질문을 하는데도 할머니는 전혀 지겨워하지 않고 여전히 같은 답변을 재미있게 하시죠.
그럴 땐 제 사생활도 살짝 털어놓으며 할머니와 소리 내어 웃곤 합니다.


할머니는 연식을 좀 섞어서 얘길 하시지만 다행히도 가족들과의 옛 일을 꽤 많이 기억하십니다. 
치매 어르신들은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져도 정서적 교감의 경험은 몸이 기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치매는 단기 기억을 앗아가지만 감정의 기억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다고 하더군요.
심리학자들은 이를 ‘감정 기억의 보존(emotional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그 감정들은 따뜻함일 수도 있고 혹은 외로움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따뜻한 보살핌의 기억을 심어드리려고 애를 씁니다.


김할머니는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누구인지 잊을 수 있지만 

당신이 따뜻한 밥 한공기 챙겨주고 싶어 하시던 어떤 사람의 미소는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이 바로 “밥 먹었냐? 는 문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누구보다 ‘밥’에 진심입니다.
그 말은 일종의 보살핌의 상징이자 엄마라는 존재의 정체성일지도 모릅니다.
가난에 찌들었고 남편 없이 어린 자식들 기르기 힘들었지만 그 모든 일이 밥을 챙겨주기 위한 당연한 고단함이었다는 것.
그게 김할머니가 살아오며 쌓아온 사랑의 방식이었고,
지금도 그 방식으로 내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대화는 어제도, 아마 내일도 반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복되는 한 문장의 대화만으로도 우리는 꽤 정다운 사이가 되었지요.

김할머니는 오늘도 “밥 먹어”를 반복하십니다.
“밥 먹었어?”
나도 웃으며 대답합니다.
“네, 밥 먹었어요. 할머니는요?”